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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진작가협회의 탄생

송계 2015. 9. 10. 17:02

1) 한국사진작가협회의 결성

한국사진작가협회 결성의 시작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각지의 사진인들도 부산으로 피난이 시작되었으며, 1951년 1.4 후퇴 후 부산으로 수많은 사진가들이 몰려들자. 당시 부산의 대표적인 사진단체였던 부산사진연구회(부사연)이 고향을 떠나온 사진가들을 위로하고자 합동통신사 후원으로 1952년 12월 (사진동인전)을 개최하였다. 또한 1953년 6월에는 부사사연이 대한사진예술연구회(이하 대한사연) 와 공동으로 (합동예술사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전시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사연이 이렇게 두 차례의 사진전을 개최한 것은 전국규모의 사진단체 (가칭 전국사진단체연합회)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 연합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정통성을 주장하는 대한사연과 부산사연이 밀 당을 벌이다가 결론을 얻지못하고 결국은 사진가 개인자격으로 참여하는 형태의 전국사진단체가 조직되기에 이른다. 즉 1952년 12월 12일 부산사연이 주도하고 전국사진가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한 한국사진작가협회(이하 사협)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회장과 부회장은 각각 대한사연의 현일영과 부산사연의 임응식이 맡았으며, 총무는 당시 부산에서 대원공사를 운영하던 조원명이 선출되었다.

이 단체의 발기취지문은 이미 한 달 전인 11월5일 송훈, 이경모, 이병삼, 이수형, 임석제, 임응식, 정인성, 정희섭, 조명원, 지부원, 최계복, 최창희, 허승균, 허종배, 현일영, 홍사영, 등 16명의 사진가가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여 작성되었으며, 작화주의와 작품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2) 한국의 모든 문화예술단체의 해산 (1961년 6월17일 포고령 6호 발령)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의 발발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장면정부가 들어섰지만 한국사회는 민간주도의 질서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군사정변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군사혁명위원회는 1961년 5월 12일 포고령 5호를 발표하고 무든 문화예술단체의 해산을 명했다. 일체의 집회, 시위, 쟁의를 금지하고 정당사회단체와 국회마저 해산했다. 이어서 1969년 6월 17일 포고령 6호를 통해 예술단체 해산령에 따른 모든 창작활동을 제한했다. 이로써 1955년에 창립된 전국사진연합회는 물론이고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한국사진작가협회 등 기존 사진단체들의 활동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이는 문화예술계를 재편해 새로운 예술단체를 창출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활동 중단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따라서 문공부와 문교부 당국자는 1961년 12월 5일 각 문화단체 대표 30명을 조선호텔에 초청해 문화단체들의 재편을 촉구했다. 당시 정희섭은 “예술문화단체의 통합을 위한 간담회”에 사진 분야의 연결위원으로 참여해 군사정부가 추진하는 문화예술단체 재편에 관련된 설명을 듣고 사협 산파역할을 담당했다. 이 자리에서 정훈장교로 구성된 군사정부의 공보 부는 “1960년 6월 17일 포고령으로 기존의 모든 문화예술단체는 해산된 상태이며 신규로 인정된 문화단체는 없다고 단언하고 분야별 단일협회를 결성한 후 각 문화예술단체 중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협의체를 구성하여 통합단체를 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울러 새로 조직될 각 단체의 간판은 “한국OO협회”로 통일하며 각 단체별 규약을 정하라는 큰 틀을 주며 예술문화단체의 자발적인 개편을 촉구했다.

3)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및 “한국사진협회”의 새로운 탄생

이로 인하여 탄생된 것이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이다. 사진계는 바로 다음날인 1961년 12월 6일 서울에 소재한 12개 단체 중 9개 단체 대표들을 포함한 사진인 25명이 서울중앙공보관에 모여 한국사진협회 발기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61년 12월 17일 “사단법인 한국사진협회”가 창립되었다. 발기 위원들과 사진인 126명이 참가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갖고 초대 이사장에 정희섭 부이사장에 김조현과 이혜문 두 사람을 선출하여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로써 사진계는 전국 사진계를 통합하는 단일단체로 발족되었으며, 예총의 산하단체로서 전국적으로 5개 도지부와 9개의 시지부로나누는 등 거대 사진조직이 되었다. “한국사진협회”의 출범은 회원들의 회비에 의존하던 기존단체들의 운영방식에서 벗어나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 사업을 기획하고 사전승인을 받아 집행하는 관변단체의 지위를 확보하였다는 점에서 사진인들이 제도권 안에서 그 위상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4) 다시 “한국사진작가협회”로의 명칭변경

“한국사진회”는 1977년 2월 28일 제16차 정기총회에서 협회 명칭을 “한국사진작가협회”로바꾸었으며, 그 약칭을 “한국사협”으로 한다고 정관에 명시하였다. 이날 정기총회에서는 이사장에 이광덕, 부이사장에 이정강을 선출하고 협회의 명칭을 변경키로 하여 “한국사진협회”에서 “한국사진작가협회”로 결의했고 이 명칭은 1977년 3월 15일자로 문화공보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정관은 “제1조 (명칭) 이 법인은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이하약칭 ‘한국사협’)이라 칭한다. 영역은 The Photo Artitst' Society of Korea)라 칭함. 영 약칭은 (P.A.S.K)라 칭함” 으로 쓰게 되었다. 

역사바로알기 (사진평론가  장한기)